13. 단어 암기가 그렇게 어려운가요
단어가 중요한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단어를 가능한 한 많이 외워야 할까? 그렇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원희를 가르치면서 느낀 것이다. 다른 엄마들 말을 들어 보면 단어는 많이 외워 봤자 조금 있으면 다 잊어버리니까 외울 필요가 없다고도 한다. 전문가들의 말을 들어 봐도 아이에게 단어를 지나치게 암기시키면 공부에 싫증을 내 오히려 역효과만 난다고 말하기도 한다. 게다가 단어를 자꾸 의식하게 만들면 스토리가 있는 내용을 듣거나 읽을 때도 단어 하나하나에 집착해서 전체를 파악하지 못한다는 이론도 있다. 타당성이 있는 말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원희가 영어 공부를 하면서 단어를 열심히 외우게 했다. 처음부터 쉽게 가르칠 수 있는 것이 단어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이가 한 단어 한 단어 알아 가는 것이 눈에 보일 때마다 마냥 뿌듯하기만 했다. 아이가 단어를 재미있게 외우게 하기 위해 많은 애를 쓴 덕도 있지만, 원희는 다행히 단어 외우는 데 그렇게 힘들어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학원에 다닐 때도 선생님이 단어 숙제를 많이 내줘서 아주 힘들어했지만, 당연히 외워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잘 따랐다. 내가 단어의 중요성을 가장 절실히 느낀 것은 원희가 3,4학년쯤으로 접어들 때였다. 영어 구문도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읽거나 듣는 데도 약간의 속도를 낼 수 있게 되니까 영어 단어를 얼마나 더 아는가가 상당히 중요해졌다. 특히 리딩 교재로 좀 어려운 것을 읽혀 보려도 했을 때 단어 실력은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아, 단어가 상당히 중요하구나'라는 것을 그때 실감할 수 있었다. 그나마 단어를 부지런히 외워 둔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그때 했다. 원희는 3학년 때부터 영어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때도 단어가 중요했던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단어 카드가 네 박스 원희의 단어 암기를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한 방법이 카드 만들기였다. 새로운 단어가 나올 때마다 한 장씩 카드에 적는 것이다. 딱딱한 도화지를 사다가 반으로 나눈다. 아이를 옆에 앉혀 놓고 앞에 단어와 발음기호를 쓰고 뒷면에는 뜻이나 예문을 하나씩 적었다. 오늘 열 개를 외우면 그 다음 날은 전날 것까지 합해 스무 개, 또 다음 날은 앞의 이틀 치까지 합해 서른 개…. 이런 식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는 그동안 배운 단어를 다 모아 놓고 재미있는 행사를 벌인다. "여기 있는 단어를 네 마음대로 분류해서 붙여 봐."그러면 원희는 refrigerator(냉장고), pot(냄비), rice(밥) 같은 단어는 부엌에 붙이는 식으로 관련 있는 단어끼리 나름대로 연상해 단어를 분류해 냈다. 그동안 공부한 단어의 복습도 되고 무엇보다 아주 재미있는 놀이였다. 처음에는 원희가 읽거나 들은 단어만 정리해서 외우다가 나중에는 <Vocabulary 22000>이란 책까지 사다가 단어를 카드에 옮겨 외우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좀 심한 욕심이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그렇게 해서 모은 단어가 6학년 때까지 모두 네 박스나 됐다. 그 많은 단어를 전부 다 제대로 외운 건지는 잘 모르겠다. 얼마 안가서 다 머릿속에서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어 외우기를 하면서 원희는 아주 귀중한 것을 얻었다. 공부를 확실히 마무리하는 습관, 단어를 보고 뜻을 짐작해 내는 유추 능력, 그리고 자신감이다. 열심히 단어를 외운 덕분에 원희는 꽤 어려운 책도 겁내지 않고 손에 잡을 수 있게 되었고 중학생이 된 후에도 다른 아이들보다 많은 단어를 빠른 시간에 습득했다. 단어야, 게 섰거라! 원희는 어릴 때부터 운동을 잘 못하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방향 감각이 부족했다. 그래서인지 오른쪽 왼쪽 구분을 잘 못했다. 원희가 고등학교 때 학부모들을 모아 놓고 '민족제' 행사를 벌일 때의 일이다. 아이들이 검도복을 멋있게 차려입고 시범 경기를 시작하는 순간이었다."우향웃!"선생님의 힘찬 구호에 모두들 절도 있게 오른쪽으로 쫙 돌아서는데 유독 한 아이가 왼쪽으로 딱 돌아서는 게 아닌가. 우리 딸 원희였다. "아이구, 망신이야! 집에서 새는 쪽박이 밖에서도 샌다더니."그 정도로 원희는 방향 감각이 없었다. 그런 원희가 초등학교 때 일인데, 단어를 잘 외우는 애가 이상하게 south(남쪽)와 north(북쪽)를 자꾸만 헷갈려 했다. east(동쪽), west(서쪽)는 정확히 아는데 유독 남북만을 그렇게 구분을 못했다.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결국 내가 생각해 낸 것이 이런 것이었다."싸울(south) 때는 남쪽에서 싸우고, 놀(north) 때는 북쪽에서 놀아라." 어떻게 하면 어려운 단어도 쉽게 외우게 할까? 나의 고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아이와 함께 고민하며 단어를 외우다 보니까 단어라는 게 묘하게도 생명이 있는 것 같았다. 외워서 내 것으로 만들기 전에는 길가의 돌덩이처럼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그래도 뭔가 느낌이라는 것이 있는 단어가 많이 있다.'wrinkle(주름살)'이라는 단어를 예로 들어 보자. 나는 옛날에 이 단어를 '윙크'와 관련지어 외웠던 기억이 난다. 윙크와 주름살, 관련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원희는 '링클 케어'라는 화장품 광고를 보고 링클이 '주름살'이라는 것을 확실히 체득하게 되었다. 우리말이건 영어건 말이란 것은 사람들 삶 속에 있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기 때문에 이처럼 무엇인가 서로 관련되고 연상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원희와 영어를 공부하면서 나는 이런 것을 많이 생각하게 했다. 아무리 해도 안 외워지거나 헷갈리는 단어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그 단어를 놓고 '너, 어디 두고 봐!' 하는 마음으로 노려본다. 그러면 무언가 연상되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여우(fox)와 늑대(wolf)를 자꾸 헷갈려 할 때는 '늑대(wolf)가 울부짖었대'라는 말을 기억해 외우게 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원희가 'idle(게으른)'이라는 단어를 배우고 나서 이렇게 묻기도 했다."엄마, 아이들은 게을러?" 어느 날 bicycle(자전거)의 'bi'가 '둘'을 뜻한다는 것을 원희가 어디선가 읽고는 아주 신기해했다."아, 바퀴가 두 개라는 뜻이구나."나는 이때다 싶어 '바이링구얼(bilingual, 두 개의 언어에 능통한)'이라는 단어를 가르쳐주었다. 생각을 해 보니까 그 밖에 내가 아는 것만 해도 꽤 많았다."uni는 '하나'를 뜻하고 uniform(유니폼), unisex(남녀 공용 패션), unicon(뿔이 하나인 전설 속의 동물)등의 단어가 있다.""tri는 '셋'이라는 뜻이고 triangle(삼각형), tro(삼중주) 같은 단어가 있다."이런 것들을 가르쳐주었더니 원희는 아주 신기해했다. 자기도 많이 들어 봐서 아는 단어들인데 그런 숨겨진 '비밀'이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다는 듯 한 모습이었다. 책방에 가서 보니까 그런 식으로 영어를 이해할 수 잇도록 써 놓은 책도 있었다. 나나 원희에게는 조금 어렵고 생소한 부분도 있었지만 쉬운 것만 골라서 하루에 한 가지씩 가르쳐 보았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extra(~밖의, 여분의)'라는 단어다. 영화나 연속극에 별 볼일 없이 스쳐 지나가는 사람을 '엑스트라'라고 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것이 E.T.와 관련 있다는 것은 나와 원희한테 아주 새로운 발견이었다.(E.T.는 extraterrestrial의 약자로 'terrestrial'은 '땅'을 뜻한다. 즉 지구 밖의 사람, 외계인을 뜻하는 말). 그 밖에'mini(작은)'에서 mini skirt(미니스커트), minimum(최소치) 등이 파생되었다는 것, 반대로 maxi(큰)'에서 maximum(최대치), maxi(발목까지 내려오는 스커트) 등이 파생되었다는 것도 함께 공부한 기억이 난다. 원희한테는 아주 신선한 경험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외운 단어가 몇 개나 될까? 원희가 영어를 공부하면서 외운 전체 단어 중에서 몇 퍼센트나 될까?당연히 비중은 많지 않다. 하지만 개수보다 중요한 것이 마음이요, 관심이요, 호기심이다. 이런 것 하나를 배울 때마다 아이는 갑자기 세상의 모든 영어 단어와 친해지는 느낌을 갖게 된다. 생소한 단어를 볼 때도 왠지 덜 낯설다. '알고 보니까 우리가 아는 사이였네' 이런 기분을 갖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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