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광주에서는...
안녕하세요. 공부할 때 에듀팡입니다. 여러분, 혹시지난 2007년 개봉한 <화려한 휴가> 영화 보셨나요? <화려한 휴가>는 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을 다룬 영화로, 개봉 당시 많은 화제를 모으며, 5.18 민주화 운동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열흘 동안,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당시 신군부 세력과 계엄군의 진압에 맞서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이죽음을 무릅쓰고, 민주주의 쟁취를 위해 항거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아시아 민주화 운동의 희망으로 자리 잡은,5.18 민주화 운동의 전개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18년간의 장기 집권을 누려온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 정보부장의 총탄에 사망함으로써 유신 체제는 마침내 그 막을 내립니다. 김재규 현장검증- 민주화 운동기념사업회/경향신문사 제공 이후 국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전두환을 중심으로 등장한 신군부 세력은 12.12군사 정변을 일으킵니다. 12.12 군사 반란 주동자 이에 재야인사와 주요 야당 의원은 '계엄 해제와 민주화 이행'을 주장했고, 전국의 수많은 대학생들은 학원의 자율화와 민주화를 요구했습니다. 서슬 퍼런 유신독재 치하에서 숨죽이며 살아왔던 국민들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화산처럼 분출했고 이 "민주화의 봄 "은 1980년 5월까지 계속됩니다. 하지만권력 장악을 위한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던신군부는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단행합니다. 그리고 공수특전단을 광주에 투입합니다.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5.18민주화 운동은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촉발됩니다. 계엄군이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등교를 하는 학생들을 막아 세우는 과정에서 구타, 폭행 등이 일어납니다. 이에 등교하지 못한 학생들은 이런 계엄군의 폭력을 알리기 위해 전남도청으로 진출하였습니다. 이에 5월 19일 새벽 3시경 증파된 계엄군이 광주역에 도착합니다. 시민의 저항은 극심했고, 장갑차와 헬기까지 동원하던 계엄군은 결국 발포하기에 이릅니다. 도심 곳곳에서는 계엄군에 의해 처참히 살해된 시신이 발견되었고, 전남도청을 향한 시민의 물결은 더욱 거세집니다. 계엄군은 시민을 향해 조준 사격을 가했고, 광주 시내의 병원은 이송된 환자와 시신으로 넘쳐납니다. 계엄군이 진압을 위해 총기를 사용하자 시민은 스스로 무장하기 시작합니다. 무기를 확보한 시민들은 '시민 군'이란 이름으로 편제되어 계엄군과 공방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결국 오후 5시 30분경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철수하기에 이릅니다. 신군부는 광주 안 모든 통신과 교통을 차단하고, 본 사건에 대한 은폐를 시도합니다. 5월 27일 새벽 4시경, 계엄군이 다시 전남도청에 도착합니다. 1시간 남짓 교전 시간 동안, 계엄군은 학살을 자행합니다. 이때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5.18 민주화 운동은 한국 내 민주화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고, 군부독재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87년 6월 항쟁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5.18민주화 운동은 95년 5.18특별 법으로 제정되었으며, 전직 대통령이었던 전두환, 노태우 등 92명이 내란, 내란 목적 살인죄 등으로 처벌받기까지 전 국민의 염원이 모여 5.18 민주화 운동 정신 계승으로 이어졌습니다. 5.18 특별법 제정으로 법정에 선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 그리고 이러한 5.18 민주화 운동 관련 자료들은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전 세계에 중요성을 인정받았습니다. 5.18 특별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5.18민주화 운동은 '폭동'으로 매도당해왔습니다. 하지만"꽃을 꺾을 수는 있어도, 봄은 막을 수 없다"는 네루다의 시구절처럼 역사 속에 진실은 반드시 밝혀집니다. 우리는 큰 빚을 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민주주의의 혜택을 감사히 여기며 살아야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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